| 이성영의 에세이 연재/ 일하기 싫은 날에도 나를 잃지 않는 지혜 4편 어둠 속에서 켜지는 서늘한 불빛 NWS방송 seungmok0202 |
| 2026년 09월 13일(일) 06:23 |
어느 날 문득, 내 가방의 무게가 유난히 버겁게 느껴지는 아침이 있다. 찌푸린 하늘 아래로 낮게 깔린 안개 속을 걸어 사무실 문을 열 때,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은 마치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켜온 서늘한 돌덩이처럼 나를 둘러싼다.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이기 싫은 무력감이 온몸의 피를 천천히 식히는 듯한 순간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서글픈 의무의 사슬을 매일 목에 걸어야 하는가. 젊은 날의 나는 이 무거운 일상의 궤도를 덧없는 굴레라 여겼고, 자신을 그 어둠 속으로 내몰며 한탄했다. 하지만 일상의 찌꺼기와 먼지가 켜켜이 쌓인 그곳을 오랫동안 서성이면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일한다는 것은 단지 삶을 견디는 일이 아니라, 유폐된 나 자신을 세상 밖으로 조금씩 건져 올리는 구원의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손끝에 잡힌 연필 끝으로 시선을 모으는 순간, 머릿속을 흐리던 온갖 잡념들이 조용히 안개처럼 흩어진다. 그것은 몰입이라는 아주 순수하고 서늘한 즐거움이다. 주변의 소음이 아득해지고 오직 내 앞에 놓인 한 문장, 하나의 서류에 온전히 젖어 드는 그 순간, 뇌는 비로소 깊은 정적 속에서 평온을 찾는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되는 그 짧은 몰입이야말로 일상이 내게 주는 첫 번째 안식이다.
마침내 한 걸음을 끝내고 대조표 위로 묵직한 줄을 그어 내릴 때의 감각은 또 어떠한가. 닿지 않을 것 같던 막막함 끝에 찾아오는 ‘해냈다’라는 그 직관적인 완성의 쾌감. 작고 보잘것없는 과제 하나를 지워내는 그 순간, 짓눌려 있던 마음 한구석에서 작고 또렷한 등불 하나가 켜진다. 그 성취감은 오늘 하루를 견디게 하는 가장 정직한 동력이 된다.
돌아보면 어제는 도무지 풀리지 않아 서러웠던 문맥이, 오늘은 조금 더 부드럽게 읽히는 날이 있다. 낯설고 두렵던 업무의 기호들이 내 손끝에서 익숙한 언어로 재배치될 때, 나는 내 안의 영토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일은 가혹한 평가의 장이기도 하지만, 내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가장 슬프도록 아름다운 무대다.
홀로 가파른 밤길을 걷는 듯한 일터에서, 문득 곁에 선 동료의 지친 어깨를 마주할 때가 있다. 하나의 문제를 두고 머리를 맞대며 나눈 짧은 한마디, 내가 정리한 무심한 서류 한 장이 그의 막막한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음을 알았을 때의 그 온기. 혼자가 아니라는 그 아득하고도 든든한 연결 감은, 서늘한 공기 속에서 나누는 온기처럼 서로의 마음을 조용히 지탱해 준다.
내가 써 내려간 기록과 처리된 문서들이, 누군가의 불 꺼진 방을 밝히고, 누군가의 막힌 막다름을 틔워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비로소 나의 존재는 유용함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작고 보잘것없는 톱니바퀴일지라도, 내 노력이 누군가의 삶에 작게나마 보탬이 된다는 사실은 내 남겨진 고독을 가치 있게 만든다.
어지럽게 얽힌 문제의 단서를 찾아 한 뼘씩 미로를 헤쳐 나갈 때 느끼는 지적 자극 역시 일의 은밀한 즐거움이다. 꽉 막혔던 답을 마침내 쥐었을 때의 그 짧은 희열은, 어두운 방 안에서 길을 잃었다가 뜻밖에 찾아낸 자그마한 열쇠와도 같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기울고 가방을 챙겨 문을 나설 때, 내 손에 쥐어진 정당한 결실을 생각한다. 스스로 일구어낸 그 대가는 내가 원하는 삶의 한 모퉁이를 지켜주는 단단한 울타리가 되고, 좋아하는 책 한 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마음 편히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남에게 빚지지 않고 내 삶을 스스로 서게 만드는 그 마음의 당당함이야말로 일을 통해 얻는 가장 숭고한 독립이다.
일하기 싫어 마음이 잿빛으로 물드는 날이면, 나는 내 일터의 그 서늘한 정적과 그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불빛들을 가만히 되짚어본다. 일은 나를 갉아먹는 형벌이 아니라, 오늘도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정직한 삶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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